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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시원한 맥주가 기다리는 그곳

원본 출처 | http://www.ddanzi.com/discussion/106951129#26

 

어려서 이상의 날개를 읽었어. 충격이었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사창가 모습이나 어디로 갈지 모르는 주인공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는 퇴색되고 말더군. 그런데 마지막에 주인공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이미지는 바래지 않는거야.

 

1993년인가? 웨딩 뱅큇이란 영화를 봤어. 동성연애자인 아들의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인데, 역시 디테일은 그저 흐릿한 기억으로 덩이졌지만, 마지막에 아버지가 공항 보안대를 통과하면서 날개짓을 하는 장면이 스틸 컷으로 머리에 남았어. 서로에 대한 인정, 자유 등을 상징하는 듯한 날개짓이었는데 말이야... 팔을 위아래로 휘휘 저어대는 그 장면이 참 강렬하더군.

 

그런데 얼마 전에 또 다른 날개짓을 보았네.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직장에 푸에르토리코 출신 할매가 가끔 출근을 하셔. 인사를 나누면 언제나 내년엔 은퇴한다는 말, 벌써 5년 째 하시는 분이야. 붙임성 좋고 농담도 잘 하시고, 언제나 웃는 얼굴. 호상이시지.  물론 얘기하는 걸 듣고 있자면 과연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부터가 과장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있지만, 한 점 거짓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한 며칠씩 아프다며 결근하는 날수가 출근하는 날수와 맞먹기도 하는데, 그 분이 오늘 출근 하셨네. 내가 화장실 다녀오다가 저 멀리서 애를 쓰며 걸음을 떼시는 그 할매를 봤지. 그 할매는 복도 한 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 걸어 갔다 오는 게 운동이야. 두툼한 팔을 휘휘 저으면서 가기도 하셔. 운동이니까. 그 분은 허리가 지구의 적도에 비할만 하기 때문에 남극 위치의 발이 기형적으로 작아 보이기도 해. 한동안은 푸에르토리코에도 전족의 풍습이 있다고 생각했었어. 과장을 조금 붙이자면 말이야.

 

어쨌든,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옆으로 샐 데는 없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네.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주고 빨리 튀자. 할 일도 많은데…  한 10 미터 전방부터 서로 눈이 마주치면서 내가 손을 흔들었어. 같이 흔드시더군. 그러다가 난데없이 한국식으로 고개를 숙여 절을 하시는 거야. 장난의 시작인 거지. 쉬이 숙여지지 않는 몸을 기울이시길래, 나도 같이 공손해졌어.

 

“하이, 아미고! 꼬모 에스타?”

 

잘 지낸다 답하고,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었어. 왜, 우리 일찌기 배우잖아, “And you?” 아, 식상해. 흠흠.

그런데 나의 질문을 가뿐히 씹으신 건지, 아니면 그에 대한 답인지, 예상치 못한 말을 하시더군.

 

“해가 작렬하는 해변, 고운 모래에 앉아 맥주를 한 잔 하는거야. 지금 말이지. 어떻게 생각해? 그런데 우린 지금 직장에 매여 있잖아? 현실은 말이야, 고통스러운 거야. 응, 아미고?”

 

그 순간 느꼈어. 낚였구나. 이야기가 길어지겠다. 아아… 직장 동료들도 이 할매를 조금 기피하는 경향이 있거든. 말이 길어지면서 영양가는 떨어지는, 그 반비례의 법칙 때문에. 난 너무 티나게 그러면 안된다는 쪽이지만, 도의적 책임감이 버거울 때가 있지.

 

“저도 그렇게 해변가에서 맥주를 마시고 싶죠. 이놈의 월급이 문제가 아니겠어요?”

 

“바로 그거야. 현실이 녹녹치 않은 거지. 돈이 나와야 뭘 하지. 안 그래, 마이 프랜드? 돈이 없으면 애도 못 낳아. 아미고는 애가 둘이지? 더 낳겠어?”

 

“우리는 그만 낳기로 했어요. 둘이면 됐죠. 돈도 없고.

 

“그렇지. 나는…”

 

갑자기 그 할매 눈빛이 흔들리더군. 눈깜짝할 새였는데, 나는 보고 말았어.

 

“알잖아? 나는 하나 있는데 이 아들놈 지금 나이가 마흔다섯이야. 원래는 하나 더 있었어.”

 

5분짜리 잡담이 15분 덕담으로 늘었다는 직감에 두어 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어. 왜 연극에서 그런 기법을 자주 활용하잖아. 무대 위 배우가 서로 위치를 바꾸면 각 배우들이 상징하는 가치나, 선악 같은 것들이 서로 뒤바뀌는. 아닌가? 아니면 말고. 어쨌든, 서로의 위치가 바뀌어서 적어도 내 사무실에 조금 더 가까워진 거지. 한데, 원래는 하나 더 있었다는 말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더군.

 

“나이 마흔에 애가 하나 들어선 거야. 남편 월급도 변변치 않은데. 어떻게 할 지도 모르겠고, 난감했지. 남편도 뭐라 말도 못하고, 서로 멍하니 쳐다만 봤어. 한참동안이나. 나이 마흔에, 창피하기도 하고. 며칠 후엔 우리 아들도 내가 임신한 걸 알았어. 그때 아들 나이가 20살 이었지. 자기도 창피하다고 난리를 피우더군. 아빠하고 아직도 그런 걸 해? 뭐, 이래 가면서 소란을 피워대는데...아이 벤디또! 난 창피해서 한 마디도 못하고. 푸에르토리코에서는 부부 성생활 같은 건 입밖에 내지 않거든. 보수적이라서. 어쨌든 상황이 너무 난감한 거야. 그래도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차츰 배는 불렀어. 그런데, 의사가 그러는데, 딸이라는거야. 우린 아들 하나라 내심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거든. 딸이라니! 디오스 미오! 그런데 이 아들놈은 그런 이야기 들으려고 하지도 않더라고. 나쁜 놈 같으니라고. 안그래, 아미고? 응?”

 

답도 안하고 그냥 빙긋 웃었어. 물론 나의 반응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니었지. 할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데, 나는 내 두 손이 뻘쭘하다는 걸 인식했어. 바지주머니에 넣어야 하나, 팔장을 낄까, 고민스러웠지.

 

“이제 애를 낳으러 가야 하는데, 남편은 그때까지도 창피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던지 병원에 같이 가지 않았어. 솔직히 그 이유는 기억이 잘 나지도 않아. 벌써 1/4세기나 지난 일이잖아. 아미고라면 그 옛날 이야기를 기억하겠어?”

 

난 글쎄~ 하는 표현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나름 자연스러운 척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었어. 타이밍이 좋았지. 그런데, 이제 손은 어색하지 않았지만, 혹시 이 할매가 나를 당돌하게 여기지 않을까 살짝 불안했어. 아닌가? 나이 지긋하신 분하고 이야기하는데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는건 한국적인 예절에만 벗어난 건가? 몰라. 모르겠다구.

 

“그런데, 누가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준 지 알아? 우리 아들이었어. 우리 아들. 우리 아들놈이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여동생이 생긴다는 것에 대해 나름 기대가 컸나봐.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신생아 카시트까지 샀더라고. 예쁜 애기 옷도 준비해 놓고. 물른 나도 준비했지만, 아들놈이 몰래 또 샀더란 말이야. 무슨 얘긴지 알아들어, 마이 프랜드? 그래서 아들놈 손을 잡고 병원에 갔더니 간호사들의 눈빛이 말이야, 남편이라기엔 너무 젊은데 누구지? 하면서도 물어보지는 못하는 그런 눈빛, 응? 그래서 아들의 손을 더 꼭 잡고 다녔어. 일부러. 적어도 그 순간에는 늦둥이를 본다는 게 행복했었지.”

 

주머니에 넣은 손이 또 어색해졌어. 체중을 한 쪽 발에서 다른 발로 옮겨도 보고, 벽에 기대보려도 했지만, 아까의 뻘쭘함과는 다른 불안한 감정이 속에서 스멀대는거야. 줄 서서 불주사를 맞는데, 이제 내 앞에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그런 느낌이랄까?

 

“무슨 이유였는지 늦둥이가 출산 중에 죽었어. 기억이 흐릿해. 누구 탓인지 모르겠지만, 의사가 나를 보고 막 뭐라 그러던 게 생각나. 아까 말했잖아. 25년 전 이야기란 말이야. 어제처럼 다 기억하고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야. 알아, 아미고? 그게 이상한 거라구. 내가 많이 울었어. 우린 아들 하나라 딸을 가지고 싶었었거든. 그런데 뱃속에 멀쩡히 담고 다니다가 세상에 나오는데 죽어버린거야. 얼마나 허무해? 가슴이 찢어지는데, 나보다 더 서럽게 운 건 우리 아들이었어. 겉으로는 창피하다고 떠들다가, 속으론 여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렸는데... 외려 겉으로 화를 낸 만큼 여동생에게 더 잘해주겠다고 다짐했었는지, 카시트도 혼자 장만했더라고 아까 얘기했지? 그녀석, 제 방에서 얼마나 울던지. 막내가 살았더라면 지금 25 살이겠다. 생일이 바로 며칠 전이었어… 기일이라고 해야하나? 1/4세기 전 이야기야, 마이 프랜드.”

 

묻어 둘 속내를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 털어낼 수 있는 건, 세월도 많이 지났기 때문이려나...

 

더 할 이야기가 없었던지, 하기 싫었던지, 할매가 한 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시더군.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양 팔을 옆으로 벌리고. 연극이 끝나고 배우가 나와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도 손을 빼고 꾸벅 인사를 했어.

 

고개를 드니 할매는 이미 돌아서서 가시더라고. 날개짓 하듯 팔을 휘휘 저으시면서.

 

저 멀리 볕좋은 푸에르토리코 해변, 고운 모래사장. 시원한 맥주가 기다리는 그곳이 그리우셨나봐.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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